일기/everydaylife2008. 3. 8. 16:22

작년 이맘때쯤 난 뭘 했던가요?

아아, 분명히 봄이 왔더랬습니다.
어둡고 우울하고 답답했던 재수생들의 생활공간에도, 봄은 분명 찾아왔죠.
다만 우리가 그를 받아들일 여유를 갖지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아직은 쌀쌀해서 투박하고 촌스런 겨울점퍼를 여미고 밖으로 나가야 했지만,
그럼에도 이따금씩 찬란했던 주말의 오후 햇살과 푸른 하늘은 우릴 심란하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언제나 마냥 기쁘지만도 슬프지만도 않았던 모호한 감정 속에서 허우적대던 우리는,
아름다운 봄날을 등지고 책과 다시 씨름했고,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한 달이 지나갔습니다.

끓어오르는 피와 보이지도 않게 우릴 컴컴하게 휘감는 밧줄의 갈등으로 신음하던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와중 몇몇 친구들은 작은 시험을 보는 날이면 함께 방에 앉아 밤새도록 소소하게 맥주캔을 까기도 했고,
흡사 인간 통조림을 연상케 하는 엄청난 인구밀도의, 창문도 뚫리지 않은 교실에서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생활을 못견딘 나머지 알바생들의 눈을 피해 탈출을 감행하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나도 종종, 숙제며 공부며 다 팽개치고, 벌떡 일어나 노래방에서 몇 시간이고 혼자 미치곤 했죠.

의미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퉁퉁퉁 몸을 튕겨 앞으로 나아가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고무인형이 된 기분에, 또, 그런 사람들로만 둘러싸인 것 같은 기분에, 한 번 죽고 두 번 죽어 스스로를 혹사하기도 했습니다.
자위하기 위해, 나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기 위해, 나를 지나치게 사랑하기도 하고, 스스로와 데이트를 하기도 했고요.
근원모를 아픔에 취해 내 유일한 '타자'로서의 친구였던 피아노를 찾다가 자신을 다치기도 했습니다.
스스로를 찢어서 없애버리고 싶을 만큼 처절했던 답답증이 지나가고 나니, 더욱 처절한 무기력증과 체력 고갈 증세가 나타나더군요.
결국엔 우울증과 정신질환에 시달리면서 술병을 붙잡고 신에게 애원하다, 원망하다, 울다, 웃다, 내적 바닥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작년의 아픔을 없던 것으로 묻어두기엔 너무나 그 존재가 커서, 사실 확 잊어버리질 못하겠습니다.
이 더없이 아름다운 새 환경에서 지극한 행복감에 감사하며 살고 있지만,
이따금씩 이 크나큰 행복이 과거의 어두웠던 나날을 불러일으킴을 막기 어렵네요.

한가롭고 여유로운 기숙사 방 창문 풍경은 더없이 평화롭습니다.
맞은편 기숙사 굴뚝은 초록의 지붕면에 나른한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목련꽃을 잔뜩 머금은 목련나무들은 봄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립니다.
학교 밖의 귀여운 별장들은 맑은 봄하늘과 부드러운 색감의 논밭 풍경과 어울려 그림이 됩니다.
날 둘러싼 모든 풍경이 사진 속 작품감이 될 정도로 아름답고 멋스럽습니다.

봄날을 즐기고 싶다면 얼마든지 즐기면 된답니다.
도시문화가 그립다면 청주 시내로 나가면 얼마든지 많이 있고,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조경과 자연의 봄도 양껏 즐길 수 있죠.
친구와 함께 해도 좋고, 혼자 즐겨도 좋습니다.
좀 답답한 기분이 들어 풀고 싶더라도, 음악관의 피아노 연습실은 언제나 열려있고요,
진짜 강남에서보다 백배는 싼 가격으로 신나게 노래방에서 놀다 올 수도 있죠.
곳곳에 아름다운 봄이 묻어나고, 대학의 낭만이 피어나고,
외로움과 고독의 아름다움도, 어울리며 찾는 즐거움도 누리고 싶은 만큼 누릴 수 있답니다.
하고 싶은 공부요? 물론 얼마든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할 수 있어요.
내가 이번에 신청한 과목들, 내가 원해서 고른 것들이랍니다.
거기에 대해, 도서관이라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을 정말 '내 마음대로' 이용하고 싶은만큼 이용해서
알고 싶은 만큼, 공부하고 싶은 방식대로 공부할 수도 있고,
추가로 하고 싶거나 알고 싶었던 것들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제약없이, 마음의 짐 없이 연구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뭘 해도 돈이 안 들어.
때되면 식당에서 진짜 맛있는 밥을 후식까지 꼬박꼬박 챙겨가면서 해줘요.
오늘은 주말이라 특히 더 맛있는 메뉴들이 날 기다린다? :)

내가 원하던 자유와 낭만입니다.
내가 원하던 대학이고 행복입니다.
지금 나보다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

참, 작년 이맘땐, 혼자 토끼집같은 방에 앉아서 대학간 친구한테 전화하다가 도리어 더 상처받기도 하고,
밖으로 혼자 뛰쳐나가 지칠 때까지 걸으면서 자학하기도 하고, 매일같이 좌절하면서 알콜에 손을 뻗치기도 하고 그랬었는데.

이런 제대로 된 대학 1학년 새내기 시절을 보내려고,
진정 아름다운 낭만을 즐길 줄 아는 대학생이 되려고,
그래서 내가 지난날 그토록 철저하게 아팠나 봅니다.



종합교육관으로 뻗은 예쁜 가로수길로 학생들이 이따금씩 걸어가고,
가까이에 나지막한 산이 우릴 보듬고 있는 듯 하고,
옥상엔 빨래가 널린 한가로운 기숙사가 넓디넓은 푸른 하늘 아래 자리잡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후 봄햇살 풍경을 보며,
쇼팽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시에 빠진 채,
나는 행복하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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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rtis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