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everydaylife2008. 7. 1. 19:28


사랑하는 나의 아들딸들
그리고 나를 돌보아주는
친절한 친구들이시여
나를 마다 않고 살펴주는 정성
나는 늘 고맙게 생각해요

허지만 그대들이 나를
자꾸만 치매노인 취급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교육시키려 할 적마다
마음 한구석에선
꼭 그런 것은 아닌데......
그냥 조금 기억력이 떨어지고
정신이 없어진 것뿐인데......
하고 속으로 중얼거려본다오
제발 사람들 많은 자리에서
나를 갓난아기 취급하는
언행은 좀 안 했으면 합니다

아직은 귀가 밝아 다 듣고 있는데
공적으로 망신을 줄 적엔
정말 울고 싶답니다
그리고 물론
악의 없는 질문임을 나도 알지만
생에 대한 집착이 있는지 없는지
은근슬쩍 떠보는 듯한 그런 질문은
삼가주면 좋겠구려
어려운 시험을 당하는 것 같아
내 맘이 편칠 않으니......

어차피 때가 되면
생을 마감하고 떠나갈 나에게
떠날 준비는 되어 있느냐
아직도 살고 싶으냐
빙빙 돌려 물어본다면
내가 무어라고 답을 하면 좋을지?

더 살고 싶다고 하면
욕심 많은 늙은이라 할 테고
어서 죽고 싶다면
우울하고 궁상맞은 푸념쟁이라 할 테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나의 숨은 비애를
살짝 감추고 사는 지혜가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여
내가 가끔은 그대들이 원치 않는
이기적인 추한 모습
생에 집착하는 모습 보일지라도
아주 조금만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이지요

하늘이 준
복과 수를 다 누리라 축원하고
오래 살라 덕담하면
좋다고 고맙다고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나도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가능하면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평온한 죽음을 맞게 해달라
간절히 기도하고 있음을 알아달라고
오늘은 내 입으로
꼭 한 번 말하고 싶었다오

그러니 부디 지상에서의
나의 떠남을 너무 재촉하지는 말고
좀 더 기다려달라 부탁하고 싶답니다
나를 짐이 아닌 축복으로
여겨달란 말은 않을 테니
시간 속의 섭리에 맡겨두고
조금 더 인내해달라 부탁하고 싶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빚진
사랑의 의무를 실천하는 뜻으로라도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말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어설픈 편지라도 쓸 수 있으니
쓸쓸한 중에도 행복하네요
어쨌든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나의 처지에
오늘도 미안한 마음 감출 수가 없지만
아직은 이렇게 살아 있음이
그래도 행복해서
가만히 혼자 웃어봅니다
이 웃음을 또 치매라고 하진 않을까
걱정되지만 그래도 웃어봅니다




                       - 어느 노인의 편지, 이 해 인







수녀님도 눈물을 서럽게 서럽게 흘리고 들어오셔서 시를 쓰셨을까. 시를 쓰시면서도 많이 우셨을까. 그러셨을 것 같다. 떨리는 펜촉으로 하얀 종이를 긁으면서 파리하게 눈물을 떨구셨을 거야.
넘치는 사랑의 힘으로, 피를 흘리고 상처입으면서도 할머니의 메시지를 끝까지 이해하려 노력할 수 있었던 나를 상기하면, 수녀님은 신의 사랑이 얼마나 충만하시기에,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법을 얼마나 완전히 알고 계시기에 저런 시를 쓰실 수 있으실까 싶다. 시를 읽으며 정말 깜짝 놀랐다. 한달 쯤 전에 할머니의 눈에서 보았던 것을 이렇게나 생생하게, 투명한 언어로, 잔잔하면서도 가슴을 뒤흔들 수 있는 힘이 묻어나도록 표현해 낼 수 있다니, ... 어떤 시인도 이런 시는 쓸 수 없다. 종교적 고결함 속에서 잔잔한 은총을 받으며 강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는, 수녀님같이 아름다운 수도자이기에 가능하다.


할머닌 잘 지내고 계실까. 저 기나긴 시가 한순간에 스쳐서, 솟아오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날이 있었다. 슬픔과 공허가 분노로 변해버린 할머니의 눈을 바라보면서, 할머니 마음을 헤아린다고 감히 말씀드리는 것도 죄가 될까, 고개 숙일 밖에 없었던.








빨간 피를 보고도 흥분하지 않고 계속해서 할머니를 애정있는 눈으로 바라보고, 거기서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사랑의 힘이었다. 하지만, 눈물은 다른 데서 왔는지도 몰라. 슬픈 나의 모습을 문득 발견하고, 나에 대한 절망적인 연민으로 주체할 수 없이 놀라버렸는지도.
할머니께 조근조근, 눈물 흘리며 말씀드렸던 그 많은 얘기들. 할머니, 속상하셨지요. ... ...
그 모든 얘기들을, 어쩌면 난, 나에게 하면서 그렇게 서럽게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애처로운 나를 바라보며, 할머니의 눈에 비친 나를 바라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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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rtis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