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everydaylife2008. 11. 27. 01:26


치과에 갈 일이 생겨서 (사실은 어제 난 정말 치통, 두통, 근육통, 진짜 몸을 가누기도 힘든 고통에 시달렸었다. 아파도 병원이 없어서 가지 못한다는 게 어찌나 서럽고 저주스러웠던지.) 이번 학기 들어 두 번째로 시내로 나갔다. 하루종일 나를 괴롭히던 불안과 공포에서 어쨌든 벗어나서, 새로운 기분을 즐기다 왔습니다.

돌아오려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나 깜놀했다. 들어봐봐. 가만 앉아서 버스가 오는 쪽으로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떤 남자가 이쪽으로 오다가 나하고 눈이 딱 마주쳤어. 근데 그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 뭐랄까, 나는 좀 '놀랐'고, 그 사람은 뭔가를 '발견'한 순간의 눈빛이랄까, 그랬거든. 그 사람이 내 앞쪽으로 와서 얼쩡거렸어. 내가 벤치의 가운데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더 앉기에 어정쩡한 상태였고, 그래서 내가 예의상 옆쪽으로 약간 자리를 비켜 앉아 공간을 만들었지. 그 사람이 내 옆에 앉았고, 차마 무심하기에도 부담스러운 느낌에 완전히 외면하고 앉아있었는데 말이지.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어. "저기.. 던킨에라도 가서 커피 한잔 하시겠습니까? "

헉.

뭐지, 이사람???? 설마 나한테 하는 말이겠나, 싶어서 그냥 무시하고 앉아있었는데, 날 가만히 쳐다보더니 또 한마디 하는거야. 그게 아주 압권.
"눈빛이... 눈내리는 들판의 야성..."
나 여기까지 듣고 딱 일어났다.

순간 오만 감정이 교차. 무섭기도 했어. 여자가 자신을 무시한다며 죽이는 정신이상자들의 이야기를 하도 흔한 뉴스거리로 접해와서인가, 다른 곳에 서 있는 내 뒤로 다가와 도끼로 찍을지도 모른다는 순간의 상상에 사로잡혀 오싹하기도 하고, 두렵고 그랬다. 그러나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그 사람은 내 앞쪽으로 지나가 사라졌다. 쓸쓸하고 고통스런 표정을 하고.

그 사람의 인상착의라면. 29-31세 정도 되어 보이는 보통 체격의 남자. 콧수염을 길렀고, 검은 머리가 길다. 얼굴은 까무잡잡한 편인데, 이목구비는 아주 또렷한 것이 이국의 수도자같다. 근데 대충 입은 듯한 트레이닝복 차림인 것이, 집이 없는 것도 같고,  뭐 그랬었다. 기기묘묘한 도인..이랄까.

눈내리는 들판의 야성을 자아내는 눈빛이라니. 이거 봐요. 굉장히 본능적이고 관능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말이 아니던가. 이것 참, 당연히 그럴 일은 없었겠지만 진짜로 커피라도 한 잔 했다간 오늘밤 내가 모텔에서 판타지같은 일탈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날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길래 그런 말을 했는지. 물론 사기꾼일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일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의 어떤 면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어.



사실 난 눈빛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란 편이다.

정말 좋아했던 국어 선생님께서 다른 학교로 가실 때 내가 보낸 메일에 답메일이 왔었는데, 선생님의 그 답메일 제목이 '너의 눈빛'이었다. 모든 아이들을 똑같이 사랑해야 하지만, 때때로 힘이 빠지고 지쳐갈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다고 하셨다. 그러나 죽어가는 교실에서 의욕을 잃어갈 무렵 다시 힘을 실어주고 생기를 불어넣는 눈빛이 있다고. 살아있는 총총한 눈빛. .....

수액을 맞을 일이 있어 맞고 있는데, 그걸 놓아주시던 선생님께서 내 눈빛을 보시고, 하버드에도 당연히 갈 인재라고 하신 적도 있었어.

학습지 선생님 중에 내 눈빛을 정말 좋아하신 선생님도 계셨다. 나를 많이 보신 분도 아니었는데, 이 아이는 분명히 큰 인물이 될 거라며,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내 '눈빛'을 그렇게 칭찬하셨었다.

난 눈빛으로 사람을 제어할 줄을 안다. 배운 것은 아닌데,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잘못한 사람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억지 논리로 날 억누르려 들 때, 특별한 말주변 없이도 그 사람 스스로 잘못을 깨닫도록 만들 수 있다. 똑바로 바라보면서 눈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그 사람은 똑바로 나를 쳐다보지 못한다. 혹은, 눈빛으로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 줄도 안다. 무한한 신뢰를 줄 수 있는 사람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눈빛을 낼 줄 안다. 만들어서가 아니라, 그 마음을 눈으로 드러낼 줄을 안다는 뜻이다.

내 눈에서는, 이성이 빛을 발하고 감성이 여울처럼 아름답게 흔들리며 본능이 여과없이 춤추고 있다. 그 점을 사실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거울을 바라볼 때면 눈을 한참동안 응시한다. 내 눈은 정말 훌륭한 명상거리가 된다, 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내 눈에 내가 빠져, 아름답다-를 연발한 적이 있다. 다채로운 성격이 기묘하게 배합되어 매혹적인 언어로, 은근하면서도 강렬한 외침을 조형하는 눈빛.

언어가 서투를지라도, 몸의 언어에는 능숙한 편이었다. 그 중에서도 눈의 언어에는 굉장히 능숙하였다. 눈빛으로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상대를 움직일 수 있다. 강하게도, 부드럽게도. 그 강도까지도 익숙하게 조절한다. 난 기본적으로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데, 이는 내 모든 감정이 눈을 통해 투명하게 배설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강렬하게. 눈은 항상 뜨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숨길 도리가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보아도, 대략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가치관은 어떤지를 읽어낼 수 있다. 사람을 볼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이 눈빛이다. 눈빛을 보고, 교감한 뒤, 나와 맞을 사람일지, 어떨지, 직관적인 수준에서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왔고, 그들의 눈빛을 잊을 수 없을 만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도 그들의 눈빛에서 다양한 메시지들을 통찰하곤 한다.

내 눈빛은, 매우 지적이고, 매우 감성적이며, 한맺힌 듯 슬프고, 감사와 기쁨의 행복에 빛나고, 관능적이고, 매섭고, 정직하고, 순진하며, 한없이 여리며, 한없이 강하다. 누구나 눈을 '예쁘게' 만들기 위해 쌍꺼풀 수술을 할 수 있다면 하고싶어한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수술하면 예쁘겠다고 하여도 결코 마음이 움직여 본 적이 없었다. 내 눈은 내 눈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내 눈이 더없이 고혹적이고 아름다웠다. 없던 쌍꺼풀이 생기면, 눈매가 달라지고, 내 눈이 띠던 총체적인 그 '눈빛'을 잃고 만다. 그것이 이유였다. 하지 않는 이유, "내 눈빛을 잃거든요."

......... 이런 저런 생각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면서 드는 생각이지만. 이런 내 눈빛을 한순간에 강렬하게 통찰한 그 사람, 만날 수는 없는 사람이지만 대화를 해 보고는 싶다는 생각. 현실이 무서우니까 당연히 따라가면 안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인간대 인간으로서, 한순간에 눈빛을 강렬하게 주고받았던 우연 아닌 우연의 인연이라는 이유를 전제하고, '대화'만 해 보고 싶기는 한 사람. 궁금해지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 내가 이렇다. 이성적으로는 배척해야 할 사람들도, 자꾸만 '이해'하려고 하고,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한 마음을 열어버리는 것이다. 이 경우엔 글쎄, 내 눈빛에 대한 나의 사랑을 순간 읽어낸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드는 찰나의 동질감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기이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 왔고, 아무도 대화상대로 삼으려 들지 않는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하다가.. 데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서, 이제는 이성으로 강하게 통제하곤 하지만 그래도 이런게 내 약점이 되다니, 참, 묘한 기분만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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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rtis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