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교육2009. 8. 31. 16:44




# 1. 초등교사 vs. 중등 체육교사

중등 체육교사 :
애들을 가르치다 보면 한숨만 나와요. 대체 초등학교에서 얘들이 뭘 배우고 올라온 건지 모르겠네요. 도무지가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할 줄 아는 게. 다시 처음부터 다 가르쳐야 한다고요. 초등학교 체육시간에는 대체 뭘 하는 겁니까?

초등교사 :
초등학교 때는 아이들이 체육 활동을 굉장히 좋아하고, 또 대개는 가장 좋아하는 활동이 체육 활동입니다. 그러던 아이들이, 중학교 이상에 진학하면 체육을 가장 싫어하는 과목으로 찍게 되죠. 대체 어떻게 가르치길래, 그렇게 체육을 좋아하던 아이들이 갑자기 체육을 싫어하게 되는 거죠?



# 2. 초등선생? 그거, 나도 가르쳐!

초등교육을 전공하는 학생들 중에, 초등교사가 전문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대학에서 한 발자국만 밖으로 나가 보아도, 초등교사의 전문성을 제대로 인정하는 사람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대체, 우리의 전문성은 왜 인정받지 못하는 걸까. 날이 갈수록 교권이 추락한다. 동네 어르신들도, 친척들도, 친구들도 말한다.

초등학교 공부? 그거 나도 가르쳐! 웬만하면 공부 좀 더 해서 중학교 선생 하지.....
초딩 선생도 좋지만 아깝다. 그래도 편하긴 하겠다 야. 시집은 잘 가겠네.



# 3. 우리의 전문성은 어디로 가 버렸을까 1.

한 학우가 말했다. 초등학교 공부는, 내용 자체가 쉽기 때문에 사람들이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이다. 맞아. 다들 안다고 생각하거든. 더하기 빼기 가르치는 거, 거기에 무슨 전문성이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거, 당연하지.

나는 이런 생각도 갖고 있다. 초등학교, 공부, 교육, 학교, ...... 이 모든 것은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거.

국영수는 '중요 과목'이고 '가정과'는 천대받는 이유가 뭔지 아셈? 국영수는 사실 아무나 잘 하기에는 멀어 보이는 과목이기 때문이다. 반면 가정과는, 요리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한마디로 과거의 '가사'와 같은 과목이라 착각한다. 우리네 모든 엄마들이 다 할 수 있는, 그리고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이미 '잘 안다'고 착각, 착각, 또 착각한다. 익숙한 것과 잘 아는 것은 다른 것임에도, 익숙하기 때문에 잘 알고, 나도 할 수 있고 아무나 할 수 있으니 별 것 아닌 것이라 여기고 마는 것이지.

작년에 가정관리학회의 추계 정기 학술대회에 다녀왔었다. 그리고 미래형 교육과정을 막고자 그 심각성을 알리고 대책을 찾는 포럼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 곳에는 가정학과 가정교육에 평생을 바치신 분들이 계셨다. 그 분들께서 눈물을 머금고 분을 억누르며 가정학과 가정교육의 중요성,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분야의 고유하고 소중한 가치에 대해 역설하고 계셨다. 그 분들이 너희 말마따나 '아무것도 아닌' 요리며 빨래 같은 것만 평생 연구하셨을 것 같으셈?



# 4. 교사론.

교사는 지식을 단순히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다. 분명한 교육관과 교육철학, 각 교과에 대한 교과관을 바탕으로, 그 지식의 참 가치를 학생이 볼 수 있도록 일깨워야 한다. 그 지식을 통해 학생들이 새로운 감각을 얻고, 스스로 끝없이 확장해 나갈 원동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아울러 교사는 학생의 발달단계와 그들의 세계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유롭게 그들에게 이입하기도 하고 관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지식 자체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배우는 과정 속에서도 다양한 가치를 습득하고 전인적 능력을 기르도록 해야 하며,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어 전인격적 멘토가 되어야 한다.




# 5. 우리의 전문성은 어디로 가 버렸을까 2.

그러나 우리네 초등교사를 상기할 때, 마음에 깊이 남은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아, 역시 그 수업은 초등교사였기 때문에 가능한 수업이었어. 그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거야.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교사가 마음 속에 있는가. 없어. 내가 만난 초등교사들 중에도 없었어. 심지어는 '현대의' 내 동기들이나 선배들도, 교육 활동을 가서 '만행'을 저지르기도 해.

그래서 아무도 초등교사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거야. 우리가 경험한 초등교사의 대부분은 이랬기 때문이지.

수학? 풀어!
체육? 놀아!
미술? 그려!




# 6. 우리의 전문성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결국 답은 아이들이다. 우리의 전문성을 교사의 학생들이 인정하지 않아 없어져 버렸듯, 우리의 전문성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이들 뿐이다. 아이들은 안다. 이 선생님이 자신들에게 어떤 생각을 갖고 수업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선생님의 행위가 자신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너무나 잘 안다.

사실 멘토링을 하면서 너무나 절실하게 느꼈던 대목이었다. 이 사람들하고 어디 나가서 동문이라고 말하기 싫을 정도로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던 선배들에게 치여 지칠대로 지쳐 있었을 때, 내게 힘을 준 사람들은 동료 교사가 아닌 아이들이었다. 매일 매일을 수업 준비와 하루 반성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던 내가, 멘토링 마지막 날까지 독하게 그 열정을 불태울 수 있도록 지켜보아 준 사람들은, 바로 내가 대하던 아이들이었다. 나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산 것이 아니었다. 내가 열정을 쏟던 대상, 그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며 그렇게 하루하루 힘을 냈었다.





수현이네 반 선생님께

To. 선생님 ♡
선생님~! 매일 수현이랑 공부하는거 보면 진~짜 재밌어 보였어요. ㅜ.ㅜㅋ
선생님~! 이제 일주일이 다 되었네요. ㅜ^
벌써 헤어져야 할 시간이네요 ㅜ.ㅜ
시간도 별로 안 된 거 같은데 ㅜ.ㅜ 벌써 헤어져야 한다니 ㅡㅡ;;ㅠ
선생님! 다른 학교로 발령나셔도 저희 잊지 마세요! 저도 안 잊을게요!
말 안 들은 거 죄송하고요...... 항상 웃어주시던 거 감사해요........
그리고 이 멘토링 저에게 큰 추억으로 남을거예요.
감사하고 사랑해요 ♡

건강하세요! 글구 놀러오세요! 09. 8.8 소이올림


 멘토링 마지막 날, 소이의 편지

#3. 교사에게 힘을 주는 사람


수업을 참관(?)한 6학년 소이는 처음엔 약간 어색해 하며(아마 그런 식으로 수업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나도 내가 하던 식의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저학년 수업이라 동화적 요소가 많아 머리가 큰 고학년에게는 ‘유치’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뭔지 모르겠다’며 툭툭대고 지나갔으나, 신기한 듯 자꾸 찾아와서는 이내 빠져들어 같이 수업을 들었다. ‘수업 진짜 재미있게 한다’고 말하고 지나가기도 했는데, 괜히 고마웠다. 사실 누구의 인정보다도 스스로 최선을 다 하고 학생이 자라는 모습에서 혼자 조용히 보람을 찾는 교사는, 고고하기도 하지만 많이 외로운 직업이다. 아직 교사는 아니지만 혼자 매일 밤을 논문을 뒤져가며 새벽까지 스탠드 불빛을 밝히고 수업 준비를 하느라 지쳤던 나에게, 학생의 긍정적인 한 마디가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멘토링 일지 중. 20090808




# 7. 발야구와 피구

발야구와 피구. 초등학교 체육 시간에 가장 많이 하는 것. 여기서 대체 뭘 배울 수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난 이 땅에서, 발야구는 그렇다 치더라도 특히 피구는, 없애야만 하는 이상한 스포츠라고 생각해.

먼저 발야구. 발야구를 하면서, 한 시간에 보통 많아봐야 4회까지 돌아가게 되는데, 그 동안 공격 팀은 한 사람당 공을 두 번 쯤 차고, 수비 팀의 경우 공을 한 번도 잡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팀이 이기고, 와, 이겼다, 하고 한 시간이 끝나는 거지.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 ................ 교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발야구에 대해 내가 어렴풋하게 생각해 오던 문제점이 명확히 정리되었어. 생각나더라, 또 그놈의 멘토링. 우리의 선배들은 애들한테 당연하다는 듯 발야구를 시키고 시간을 때웠지. 너네, 체육교육론이랑 방법론 다 들은 초등교육과 전공 학부생 맞아?

다음, 피구. 교수님께서 피구가 싫은 사람은 손 들어보라고 하셨을 때, 난 망설임 없이 손을 들었다. 왜냐고 물으셨을 때, 내 옆 학우는 공이 무서워서라고 했고, 내 대답은 이랬다.

사람을 금 안에 가둬두고 공으로 쳐서 죽이는 게임이잖아요.

학우들 모두 웃음을 터뜨렸지만, 교수님께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철학적 대답이라며 말을 받아주셨다. 학생들이 공을 무서워하게 만들고, 한 사람씩 탈락시키는, 탈락 게임. 그게 피구라시며.

난 진심으로 피구가 싫었다. 체육 시간마다 하는 피구, 친구들은 시간을 때운다고 좋아했지만 난 그저 싫었다. 공에 맞는 것은 무척이나 기분 나쁜 일이었다. 누군가가 날 겨누고 공을 던져 맞추면, 난 죽은 것이었고 나가야 했다. 난 친구들을 향해 공을 던지는 건 더 싫었다. 받으라고 던지는 게 아니라, 맞추려고 던지는 게 너무 싫었다. 동물에게도 그런 짓은 하면 안 된다. 대체 이걸 하면서 얻는 게 뭐란 말이야. 비교육적인 면이 수십가지다. 아무렇지도 않게 십여 년 동안 학교에서 이뤄지는 이 피구 게임에서, 배틀로얄이 연상되는 건 나 뿐인가.


이런 게임을 아무 생각없이 시간 때우기 용으로 하면서, 발야구와 피구를 금지하면 '그럼 초등학교 체육 시간에 뭐 해요' 하고 되묻는 초등교사가 있다는 건, 충격의 수준을 벗어난 폭탄급 발언이다. 당장 교직을 해제하거나 자격 연수를 철저히 다시 시켜야 한다. 마음껏 놀아라, 놀면서 얻는 것들에 대한 명확한 생각이 있다면 그냥 놀라고 하더라도 그 교사의 철학 아래서 의미 있는 수업이 된다. 그러나 철학 없는 시간 때우기는 범죄나 다름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 8. 기능과 잘 가르치는 능력의 상관관계

잘 하는 것을 잘 가르칠 가능성은 언제나 높겠지.
하지만 잘 한다고 해서 잘 가르칠 수 있는 건 절대로 아니야.
잘 하지 못하더라도 잘 가르칠 수도 있는거야.

중국의 교사들을 봐.
수학의 경우도 그렇고, (리핑 마의 논문을 읽어보면 참 충격을 많이도 받게 된다.)
체육도 그렇다네.
10년 전의 체육 수업이 이랬대.
여러 장애물을 설정해 두고, 아이들끼리 기록을 재며 빨리 들어오는 법을 연구하게 했대.
아이들은 각 주자들의 특성도 파악하고, 장애물의 배치와 간격, 순서 등의 변화,
옆 팀들의 전략 등을 보고 배우고 연구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갔지.
여기서 교사는 아이들의 기록의 측정해 주고 문제를 던져준 것 밖에는 한 일이 없지.
하지만 이 교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명백했어.
교사는 체육 수업을 통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분명히 있었어.
그들은 언제나 노력하고, 어떻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 지 언제나 연구해.
그리고 그것이 결정적인 차이를 낳지.




# 9. 왜 체육을 가르치고자 하는가?

나는 어릴 적 몸을 움직이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아이였어.
하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체육을 가장 싫어하게 됐지.
그리고 대학에 왔어.
난 대학에 와서는 절대로 체육을 안 할 줄 알았어.
하지만 본의 아니게 초등교육을 전공하게 되었고, 3학기 동안 체육을 전공 수업으로 들었지.

그런데 이상하게, 대학에서 교수님들께 체육을 배우면서는 기분이 전과 달랐어.
몸을 움직이는 것이 마냥 좋았던 어린 시절이 다시 상기되고,
체육을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졌었어.

피구나 발야구만 하면 끝나던 때와는 배우는 것 자체가 달랐지.
1학기 때 나는 10년 전 중국에서 이루어졌다는 그 수업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교수님께선 우리에게 전략을 찾는 법(전략이 아니야. 전략을 찾는 법. 물고기를 찾는 법 말이야.)을 알려주셨고,
우리는 단순하다고만 생각했던 이어달리기 수업에서
문제 해결력, 논리력, 협동심 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부차적인 것들을 배웠다.
3학기의 구기 수업 때도, 야구며 축구라면 쳐다보기도 싫어했던 내가,
보는 스포츠, 읽는 스포츠의 즐거움을 알아가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2학기 전통 무용 수업 시간에도, 우리 음악에 몸을 맡기고 흥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우리의 멋에 흠뻑 취했었다.
난 그 감흥을 몽골 땅에서 몽골의 대학생들에게 전해주었고.

기능을 배우고, 그 기능에 뛰어난 사람만 재미있는 것이 체육 수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매 수업 시간은, 내가 생각하던 체육 시간은 진정한 체육교과의 모습이 아니었음을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다.
수업 시간마다, 기능 뿐만 아니라 다른 전인격적 가치들을 체득하는 과정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철학을 갖고 체육교과를 가르치시는 교수님들의 가르침 속에서, 학생인 나는 그 노력과 열정, 가르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당연히 느낄 수 있었다.

왜 체육을 가르치고자 하는가.
여기에 대한 명확한 생각이 반드시 정립되어야 바르게 가르칠 수 있다.
3학기 동안의 올바른 체육 교과를 경험하고 난 지금,
나는 어렴풋하게 느껴왔던 '그것들'을 구체적이고 생생한 나의 언어로 정립하려 한다.
그 답을 찾고자, 드디어 4학기가 된 지금, 체육교육론 강의실에 두근대는 마음으로 앉았다.



Posted by artis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