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everydaylife2009. 12. 25. 01:07



몇 년 만인지.
아니, 너무 까마득히 옛날이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낸 게.
크리스마스는 남의 이야기이기만 했던 지난 시간들...

몇 개월 전부터 벼르고 별렀던,
'행복한 크리스마스 이브'를 결국은 보냈다, 오늘...!
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사실은 이게 최고로 따뜻하고 행복한 것이다.

내가 솔로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솔로의 크리스마스가 시리다고 말하는 건
중요한 걸 잊어버린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 생각해.
가족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이거 절대로 당연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들이 외면하는 이 '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를,
기어코 보내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그래서 오늘이, 너무도 행복하고 감격스럽다.
크리스마스 인사 문자가 아무에게도 오지 않아도.. 상처받지도 않는다.

크리스마스는 특별하게 보내야 하는 날이 아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축복인 날이다.
'크리스마스'라는 말이 주는 따뜻하고 넉넉한 기운,
행복, 설렘, 기쁨... 이런 것들이, 그냥 자체로 선물이다.

근데 지금 듣는 라디오에서는 난리가 났네, 외롭다고들.
....... 아무튼 난 행복하고... 좋네.
어딘지 모르게 서글프기도 하지만,
- 아마도, 이 구슬픈 노래들이 내가 억눌러둔 무언가들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겠지-
아무래도 좋으네.


1994년 어느 늦은 밤
박정현- 이별하러 가는 길
익숙한 그 집 앞
.. 이런 노래들이 흐르고.




오늘 아빠는 탁구를 하러 가겠다고 했다.
엄마는 그래서 아빠랑 싸웠고.
엄마는 혼자 막걸리 한 병을 다 드셨다.

나는 아침부터 부산하게,
군대 간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처리할 일들을 빨리 해치워내고,
크리스마스 맞이 쇼핑을 동생이랑 엄마랑 다녀왔다.
나는 케익이랑 쿠키 구울 재료 중 모자란 걸 좀 샀고...
동생이랑 바디워시 향을 이리저리 맡아보며 맘에 드는 걸 골랐다.

동생이랑 재잘거리면서 크리스마스 쿠키랑 케익을 구웠다.
만든 쿠키와 케익에 데코레이션을 하면서 즐겁게 떠들었다.
동생이 쿠키에 우리 가족의 얼굴을 그려넣었다.
신기한 게, 진짜 똑같았다는 거.
강아지 얼굴까지 똑같이 그렸다!
나도 여러가지 글자를 써넣었어.

우리가 베이킹을 하는 동안,
엄마는 거실 불을 끄고 오디오 조명만 켜 놓으셨다.
엄마가 좋아하는 올드팝과 지나간 노래들이 조용히 집안에 흘렀다.
조그만 크리스마스 트리가 어두운 거실 한 켠에서 반짝였다.

Happy Home, Merry Christmas, '그놈의 탁꾸!', '아빠 사랑해요',
'Love',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원하는 문양.... 등을 새겨넣은 쿠키들.
우리 가족의 얼굴이 꽂히고, 하트표도 많이 꽂았다.
예쁘게 꾸민 생크림 초코케익에 스파클라와 쿠키로 데코레이션을 하고,
크리스마스 트리, 촛불, 가족사진을 모아 꾸미고는 아빠를 불렀다.
그리고 '결혼 축하 노래'를 열창했다.
아빠의 태도 때문에 엄마가 또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크리스마스 이브다운,
행복한 날이었다.
심지어는 강아지까지도 신이 나서 즐겁게 뛰어다녔어.


오늘 크리스마스 노래도 실컷 들었고....
영화도 다운받았다.

완벽하게 행복한 하루였어.

그리고 지금 갑자기 드는 생각이지만,
유희열씨 목소리... 정말 섹시하고 자상한데.
내 남편 목소리가 이렇다면 좋겠네.
이런 목소리로 침대에서 '사랑해' 하고 속삭여준다면,
난 아마 정말로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고 말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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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rtis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