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는데, 입구에서 교지를 나누어주길래 받아왔다. 올 컬러판에, 내용도 풍성하고 여러 사람들의 땀이 밴 책자라는 걸 알기에 큰 선물을 하나 받은 기분이었어. 그걸 들고 기숙사 쪽으로 걸어오는데, 식당 맞은편 벤치에서 우리과 우리 학번에서 만든 작은 밴드가 내일 있을 공연을 홍보하고 있었다. 지난 학기 과대가 잔잔한 노래를 열창하고 있었고, 벤치에 조용히 앉은 이번 학기 과대 오빠가 다리를 꼬고 앉아 통기타를 치고 있었다. 훈훈한 광경이었다. 오빠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나는 음악 하는 사람들, 음악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 동아리나 밴드를 만들어 음악을 향유할만큼 열정 있는 사람들에게 묘한 공감대를 느낀다. 그리고 그들도, 음악을 통한 소통의 묘미를 물론 잘 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과는 이내 대화를 터 나가곤 한다.
오늘 완성할 과제로 초현실주의 그림 한 점이 있었다. 스케치만 막 끝내 놓은 종이를 책상에 펴 둔 채, 밖에서 막 들어온 나는 교지를 펼쳐 잠시 기사들을 훑어보았다. 편집장님이 홍대 클럽에 갔다 와서 쓴 글이 있었다. 인디 밴드들의 음악에 관심이 많으셨구나. 음.... 익숙한 이름들, .. 그러다 한가지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난 충격을 받고 한동안 멍청해져 있었고.
루싸이트 토끼의, 꿈에서 놀아줘, 라는 노래가 있다.
전 남자친구와 사귀게 되었던 첫 날, 그 사람은 나에게 작은 생일 케이크와 함께 루싸이트 토끼의 새 앨범을 빌려주었었다. 세상이 온통 핑크빛이었던 그 날 들었던 그 앨범은, 더없이 사랑스럽고 달콤하기만 했다. 앨범의 모든 노래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지.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던 노래, ..가, 사실 그 날 이전에는 '북치는 토끼'였으나, 그 날부터는 '꿈에서 놀아줘'가 되었다. 그래,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반짝이는 핑크빛. 노래의 분위기는 내 기분을 정말 기가 막히게 표현하고 있었고, 그 날부터 한동안 내 싸이 홈피의 배경음악이 되었다.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었던 그 시기, 꿈에서라도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었고.., 이 노래의 가사는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게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느껴졌었다.
그런데, 이 노래가, ... 약속을 계속 '파토'내는 남자친구에게 아직 이별의 조짐을 파악하지 못한 채 귀엽게 칭얼대는 슬픈 모습을 노래한 것이란 걸, ..... 오늘에서야 알았다, 오늘, 에서야..
그러고보니, 여름방학 내내 전화를 기다리고, 휴일을 기다리고, 만날 날을 못 잡아 안달하고, 못참던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 꿈에서라도 만나자고, 놀아달라고, 애교부리고 보고싶다고 칭얼대던 내 모습...이 너무도 똑같이,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 지난 여름, 실제로 그는 나에게서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고, 나의 존재를 너무도 당연하게 여긴 나머지 귀찮아하기 시작했으며, 열정도 고마움도 없는 사람이 되고 있었다. 나는 작은 조짐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내 속이 좁은 탓일 거라 생각하며 항상 웃으려 노력했고, 트집 잡을 수 있는 일들도 너그럽게 넘어가곤 했다. 이해할 수 있는 최대 한도를 무한대로 잡고 있었던 그 시기. 오직 사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랑받지 못한다는 기분에 마음 한구석은 늘 서늘했고, 이따금씩 못견디게 서러워질 때면 참던 눈물을 터뜨리며, 아무 일도 못할 지경으로 우울해져 침대 속에 박혀 나오지 않곤 했다. 가슴속에 깊이 새겨지고 있던 생채기에 뽀얀 먼지가 내려앉을 무렵, 나는 그와 헤어졌고, ... 직전에야 깨달았다, 그 모든 것이, 이별의 조짐이었다는 걸, 그가 날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사랑을 주어도 제대로 받지도 못하는 못난 사람이었다는 걸. 나는 그것도 깨닫지 못한 채, 처음엔 서로 사랑하던 것이 짝사랑이 되어 가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그래, 어쩌면 바보처럼, 그렇게 혼자 사랑에 달떠 귀엽게, 칭얼, 칭얼, .. 댔었다는 걸. 그 슬픈, .. 모습, 이 역설적으로 슬픈 노래가, 다른 이가 아닌, 바로 나의 이야기였다는 걸. ...
지금은 '북치는 토끼'가 '꿈에서 놀아줘'보다 더 좋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이, 다소 충격적인 사실에 한동안 애틋함 비슷한 것이라도 느꼈다는 것이, 나도 아직 완전히 예전 기억에서 자유롭지는 못한가, 싶기도 하다. 그렇지, ... 얼마나 지났다고, .. 두 달 반 정도 지났나. 상처만 받던 입장이라 오히려 더 괴로운 기억을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내 생채기가 완전히 보이지 않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 지 모르겠다. 헤어진 지 삼 일 정도는 정말 격하게 괴로워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었고, 이후에 나에게 악재가 겹치고 그에게서 자꾸만 연락이 올 때까지도 그리 좋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난 빠르게 잊어버렸고, 그가 새 여자친구를 사귀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비통하기보다는 가소롭다고, 코미디가 따로 없다는 생각까지 하였다. 그리고 새 여자친구와 이내 다시 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비웃음 비슷한 것을 흘렸으며 당연한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새 여자친구가 생긴 뒤 기고만장했는지 나에게 했던 엄청난 막말들과 행동들, 순간 화를 내고 기가 막혀 하다가도, 이런 에너지조차도 소모라는 생각에 그만두고 내 일에 집중했었다. 그리고 지금, ... 가을은 가고, 나의 겨울이 왔고, 나는 상당한 정도의 안정을 되찾았으며 차분하게 내 일들을 해 나가고 있다. 나를 괴롭히던 것들을 떨쳐내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으며, 사소한 행복을 즐기고 웃던 천성도 회복하고 있다. 심지어 미련이 남은 그 사람의, 후회가 가득한 메일을 한 통 더 받았을 때에도, 난 차분했다. 그는 자신만큼 나도 힘들지 않길 바란다고 했지만, 나는 그 순간 자신있게 '힘들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 그래도 아직 완전히는 아닌가보다, 세월이 더 지나야 하나보다, ... 아프다, 그 사람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사랑받지도 못하면서 혼자 정이며 내 모든 걸 다 주어 버렸던 내 기막힌 천성이 가련해서. 그에게서 사랑받았던 기억보다, 내가 사랑하다 상처받았던 기억만 남아버렸다. 그가 헤어진 뒤에 하는 행동들도 나에게 무차별적인 상처를 내는 짓들이었다. 더욱, 좋은 기억들은 달아날 수밖에. 모든걸 주고도 이런 막말이나 듣고, 이런 대접이나 받는 내가 가련해서, 그런 나를 보는 것이 안쓰럽고 마음 아파서 이 노래를 들으면 괴롭다. 이 사랑스런 노래가 날 이렇게 심란하게 할 줄은 몰랐다.
하루가 너무 길었어
네 전화를 기다리는 난
TV 소리에도 귀가 쫑긋
심심해
오늘은 너무 더웠어
선풍기 바람 맞으면서 난
소파 위를 하염없이 뒹굴
지루해
이러는 게 어딨어
오랜만에 너와 함께 보낼 휴일 기다려온 난
이대로 지쳐 잠이 들고 있는데
그러니
꿈에선 놀아줘
비가 오지 않는
꿈에선 놀아줘
사람도 많지 않아
꿈에선 놀아줘
해 저물 때까지
꿈에선 놀아줘
별이 질 때까지
- 꿈에서 놀아줘, 루싸이트 토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