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들떴고, 우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 이런 날씨 좋은 날에, 학교 밥은 맛이 지지리도 없고, 할 일은 많고 닥쳐올 일들이 차마 쉽게 감당되지도 않는데, 의욕은 없고 - 할 일 못지 않게 하고 싶은 일도 무진장 많은데, 난 무엇에 이리 주춤대는 건지, 이것에도 저것에도 섣불리 손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만 있다.
동아리 스폰을 받으러 가는 날이어서, 언제나 그랬듯이 '해야 하는 일들'을 일단 제쳐두고 동방으로 향한다. 그저께 동기녀석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제 혼자 다니는 것이 너무나 홀가분하고 자신만만해서, 참 좋다고. 혼자 다니는 것,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고. 나는 차마 펴지지 않는 표정을 스스로도 느끼며 혼자 학생회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ㅅ의 목소리. 우린 서로 미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너와 나는 서로가 부담스럽다. 너는, 내가 챙김받는 실력자라는 사실이 싫겠지. 우리 조원들이 다들 책임감 있는 실력자들이라서, 우리 팀은 알아서 잘 돌아가고 있으며, 그 덕에 그닥 내세울 것도 없는 내가 인정받는 게 얄밉기 짝이 없겠지. 하지만 사실 우리 팀이 처음 시작할 때는 그렇지 않았음을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
처음 팀을 구성할 때, 작은 연주회 팀이었기에 난 딱히 실력을 가리지 않았고, '된다'고 답한 애들을 데리고 만들었었다. 우린 그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서로 친하지도 않았고, 막말로, 실력으로 인정받던 사람들은 아니었다. 아. ㅈ은 그래도 인정받고 있었지만. 하지만 내가 듣기에는 쨍쨍대는 소리와 불안정한 박자 탓에 결코 '음악'적 실력자는 아니었어. 그래. 오만한 내 판단이야. 암튼 모두들 인정했었지. 나머지 두 사람들은, 소리도 좋지 못했고 스케일도 부족했으며, 각자의 합주 조에서 비교적 떨어지던 사람들이었어.
하지만 난 팀을 구성했다는 미명 하에 실질적 조장이 되었고, 강요하지 않되 신뢰와 열의를 바탕으로 한 부드러운 리더십을 염두에 두고 팀을 지휘했었다. 나가야 할 진도와 남은 시간을 철저히 계산해서, 빡빡한 느낌이 들지 않되 집중적인 연습시간을 잡아 함께 연습하도록 유도했고, 각자에게 부족한 점을 구체적으로 인지해 효과적으로 연습할 수 있도록 언지를 주며 실질적으로 팀을 이끌었었지. 그 결과, 2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우리 팀은 선배들도 깜짝 놀랄 만한 무대를 만들었다. 그 후로 우린 인정받았어. ... 마치, 그 전부터 실력자들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다시 팀을 결성하겠다고 했을 때, 악장의 시선이 따가웠지. 다른 사람들은 제쳐두고, 우리끼리, 그러니까 실력자들끼리 다시 뭉치는 게 달갑지 않았던 거지. 우린 분산되어 모든 팀의 질을 고르게 만들어 줄 의무가 있었다는 거야. 하지만, 우리가 최초에 팀을 만들 때도 그랬던가. 모두, 최초의 그 때 우리들의 상태를 깨끗하게 잊었다. 우린 부족했고, 서로 믿고 사랑하며, 그리고, ..... 내가, 스스로 구심점이 되어 팀원 모두가 마음놓고 프로그램에'도' 집중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 결과 우린 거기까지 갔고, 그걸 발판으로 한 번 더 뭉쳐보고 싶다는 거였는데-.
정기 연주회때 연주할 곡을 결정하고 연습할 때에도, 우린 참 바빴다. ㅈ은 부학회장 일 때문에 합숙 중간부터 합류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프로그램 곡 운지는 커녕 합주곡 운지를 떼는 것만도 힘들어서 고전을 해야 했다. ㅇ도 처음부터 합숙을 하지 못했어서, 개강 후부터 프로그램 곡 운지를 뗐다. 그에 비해, ㅅ, 너희 조원들은, 거의가 합숙 일정 내내 참여하지 않았느냐. 시간도 많았고, 맘만 먹었으면 우리보다 훨씬 잘 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사실, 실질적 구심점이 되어 누군가가 부드럽게 모두를 이끌지 않았기에 다들 나몰라라 하고 팽개쳐 둔 것이 화근 아니었느냐. 개강 후에도 우린 미친듯이 바빴다. 우리 넷은 모두 과가 다르기 때문에 시간이 도무지 맞질 않는다. ㅇ은 저녁 시간마다 일이 있어서 만나기 힘들고, ㅈ은 부학회장 일에 근로까지 하니 주중 시간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주말에도 엠티니 답사니 일들이 좀 많아야 말이다.
시간이 점점 없어질 것을 예지하고 서둘러 대책을 세우는 사람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차이다. 난 처음부터 개프 날짜를 잡는 데 신경을 곤두세웠다. 개강 이전부터 개프를 생각했고, 개강 후 넋놓지 않고 얼른 모인 다음에야 실질적 연습에 빨리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각자의 시간표를 세 장씩 뽑아오도록 하여, 서로의 일정을 알도록 했다. 공강때 개인연습을 할 적에, 시간이 맞는 사람에게 연락하여 둘 혹은 셋씩 모여 연습할 수 있게 한 것이었지. 일주일마다 혹은 3일 단위마다 각자가 팀의 전체 진도를 위해 성취해야 할 부분들을 단체문자로 상기시켜주었다. 개강 첫 주가, 그래도 그나마 모일 시간이 제일 많다는 걸 알았기에 연습을 더 미루지 않았다. 우린 그 주 주말에 시간이 되는 한 계속 연습했다. ㅈ은 심지어는 하루만에 운지를 다 뗐다. 그 전까지는 전혀 손도 대지 못한 것이다. 너무 바빠서.
우리의 곡은 각자가 운지를 뗀다고 맞출 수 있는 곡들이 아니다. 철저한 개인 연습을 기본으로,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호흡을 맞춰야만 완주할 수 있는 것들이다. ㅇ의 파트는 특히 어려웠다. 빠른 속도로 운지를 바꾸고 3화음을 연타해야 하는 것이다. 첫 오디션 전까지도 우린 모두가 완주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가장 연습을 많이 한 팀이었음에도, 곡 자체가 어려워서 완주도 힘드니 맘이 가볍지 못했다.
암튼, 우린 또 지속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ㅅ 네가 보기에는 정말 우리가 별 어려움이 없이 순항하는 걸로만 보이겠지. 하지만 우린, 정말로 모일 시간이 없어서 주말에 속성으로 연습하곤 한다. 개인연습을 빼놓지 않도록 내가 가끔 상기시키는 문자를 보내기도 하지만, 실상 다들 그러기 힘들다는 거 안다. 그 하나뿐인 주말도 넷이 모이기가 힘들어서, 실질적으로는 그리 연습을 많이 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 시간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지속적으로 고민했고, 보완해야 할 점을 빠르게 파악해 가장 효과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늘 연구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짧은 시간 내에 효과적인 연습이 이루어지도록 계산했다. ...
그 모든 장애를 딛고 이렇게 해 내는 거라는 걸 안다면 넌 내게 그런 시선을 보낼 수 없다.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네가 날 인정하고 싶지 않아한다는 거, 얄미워 한다는 거, 너무 티가 나서 나도 할 말이 없다.
나도 날 낮추면서 나가고 있는데, 어차피 다 인정받지도 못하는 건데도, 묵묵히 할 일을 하는 나에게 못된 질투만을 내던지니- 어찌나 화를 돋우는 일인지 모른다. 나 지난 학기에는 학과 공부에서도 드라마틱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었고, 몰입한 결과 4.42라는 거의 완벽한 학점으로 가시화되었었다. 뭐.. 내 동기들은 아무도 모른다. 어린 동생들은 머리가 좀 컸다고 나한테 소주를 부어 먹이려 한다. 내가 공연 동아리를 하며 격하게 논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막장 이미지. 학과 공부가 전부인 너희에게, 난 학과 공부에 있어서 막장인 것처럼 보이겠지. 실상은 정 반대인데 말이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갑갑함에 울분만 자라고 있었다.
그 모든 감정을 한꺼번에 표출시키는 ㅅ의 목소리가 들리길래. 난 급격히 말수가 적어졌다. 그들과 함께 걸었지만, 한 마디도 할 말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ㅅ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나도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아끼는 동생인 ㄱ은 ㅅ과 이야기했고, ㅅ이 있으면 항상 그렇지만 ㄱ과 얘기하기 힘들었다. 할 말도 없고 기분도 좋지 않아서 걸음이 빨라지는대로 그들을 앞질렀다. ㄱ은 내 눈치를 계속 살폈다. 예민한 녀석. 너한테 화가 난 건 아닌데. 괜히 미안하기도 했고 예쁘기도 했다. 그래도, 이 내 맘을 헤아려 주는 사람이 한 명은 있다는 게 어찌나 위안이 되던지.
그렇게 말없이 스폰을 다녀오다, 우린 그냥, 다 들뜨고 말았다. 아- 이런 봄바람이라니. 인문관 앞 잔디밭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즐거운 모임을 갖고 있다. 합주 조 조장 오빠가 말했다. -아 정말, 이런 날이 날인데. 술먹기 딱 좋은 날 아니냐. 회장 오빠도 말했다. -우리 오늘 아니면, 연주회 후라야 이런 모임 할 수 있을거야. 오늘 가볼까?
야식을 시켰고, 9명의 사람들이 모여앉아 참이슬을 열었다. 약 30분 정도만에 다섯 잔 정도를 들이킨 것 같다. 급하게 취기가 올라왔다-
딱히 남자가 그리운 건 아니었다. 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고, 내 감정을 충분히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외로웠다. 일에 집중도 하지 못하고, 할 일만 산더미인 것이 부담스러웠다. 어제 ㅇ이랑 시간이 맞아서 둘이 동방에서 차분히 연습했다. 연습이 끝나고 밥 먹을 시간이 되었을 때, 내가 밥을 누구랑 먹을 거냐고 묻자 ㅇ이 '나 버리지 마' 하고 장난스레 말했다. 그냥, 전에도 그랬듯이, 같이 나오는 김에 밥도 같이 먹었다. 근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눈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우리도 할 말이 없어진다. 평소에 우울했던 기분도 같이 올라온다. 우린 식당을 나오면서 많은 눈초리를 받았고 의심을 받았다. 내가 딱히 할 말도 없었기도 했지만 생각나는 게 그런 것들 밖에 없어서 좀 평소답지 않은 말을 한 것도 같다. 괜히 후회되지만 그냥 잊었다. 아무튼 그게 갑자기 생각났어.
외지주 얘기가 또 나왔다. 이럴 땐 어쩔 수 없이, 예쁜 동기들이 미워진다. 내가 그보다 못할 것 하나 없는데도, 남자란 쓰레기들은 여신이니 뭐니 하며 추앙하고 떠받드는 것이다. 그 동안 나는 역사의 뒤안길에 선 그림자가 된다. 지네들 꼴은 생각도 안 하고 결국은 다 외지주냐. 밉고 짜증났다.
강의 시간에 들었던 얘기가 생각난다. 그 인간극장같은 실제 스토리. 알콜 중독인 아버지가 학교를 매번 찾아와 딸을 때리는 탓에 자퇴할 수 밖에 없었던 반 1등이었던 그 여학생. 선생님이 매달 보내주시는 30만원 밥값을 쓰지 않고 고스란히 모아 돌려드리고, 그 동안 34킬로그램정도로 몸무게는 줄고,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는 감동 스토리. 수능을 남보다 일찍 봤는데도 400점 만점에 387점을 획득, 4년 장학금을 보장한다는 학교에 입학했고 다음 달에 결혼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 때 아버지를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라고. 자퇴 후 그 여학생은 아버지를 피해 은둔생활을 했단다. 그래그래. 그런 사람들도 있는데, 난 뭐 행복하지. 근데, 어쩌라고. 어쩌라고, 어쩌라고! ............................... 말 뿐. 지금 당장 내가, 행복하지 않은걸.
술을 먹고, 잠시 떠들며 봄바람에 즐거웠다가, 또 이냥 저냥 심란하기도 하고 그렇지. 12시에 들어와서 벌점 2점을 썼다. 조교 언니가 내 이름을 아시더라. 어!. 제 이름을 아세요? 알지. 옆에 층장이 앉아있다. 오늘 날씨가 너무 좋잖아요. 아시잖아요, 오늘 동아리 급모임 했어요. 층장은 우리 동아리 21기였다가 탈동했거든. 공연이 있나봐요? 네, 또 벌점 쓸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걱정이에요. 내가 알기론, 지금 이거 쓰면 11점인데. 헉, 그것도 기억하세요? 기억하지요. 조심하세요. 네, 고맙습니다.
잠을 어떻게 잤는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눈이 붓고 너무 아프길래 깼다. 약간의 숙취. 심장이 뛰고 아프다. 화장을 안 지우고 잤나. 거울을 보니 피부가 좋은 것 같다. 걱정되어 세수를 해 보니 화장은 지우고 잔 게 맞다. 물을 마셨다. 지난 학기 마지막 즈음 물을 마시면서 느꼈던 심장의 압박이 다시 느껴진다. 힘들다.
간밤에 꾼 꿈들이 머릿속을 오고간다. 저, 학점이 4.48이에요! 하고 말하던 어떤 여자가 갑자기 머리를 스친다. 그 여자는 인정받고 있었고 난 그를 보며 기분이 좀 상했던 것도 같다. 꿈에서 물을 끝없이 마시기도 했다. 또 여럿. 하지만 생각은 안 나네, 당장은.
간만에 쏟아내니 어쨌든 좀 낫군. 풀어내지 못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있지만.
모든 게 큰 변화 없이 흘러갈테고, 모두들 기쁘게 즐기는 활기 속에 내가 어떻게 침잠할 지는 모르지만, 암튼 말없이... 어떻게든 지내봐야지. 욕심없이 살다보면 뭐든 다시 상승할 때가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