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엔 미술실기 II 강의가 있다.
한주간 강의실에서의 배움이 마무리되는 금요일, 그 마지막을 미술로 장식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지극한 축복인지 모른다.
구도와 형태와 빛의 감각을 인지하고, 몇가지 사물들을 배치해 놓고서-
쓱쓱, 가볍게 스케치한 뒤 수채물감으로 빛을 입혔다. 내 손끝에서 다채롭고 아름다운 빛깔들이 환하게 피어났다. 넉넉하면서도, 나를 표현하기에 딱 적절한 크기로 자리잡은 그림에, 내 영혼의 일부가 묻어나 날 다시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더이상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보고 부러워하거나 비교하면서 속상해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그들의 영혼과 즐겁게 소통하고, 그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엿보고 그들의 내부와 교감하는 묘한 쾌락의 경험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발상과 표현방식이, 내가 아직 찾지 못한 내 안의 숨겨진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데 도화선이 되는 경험으로 가져가도록 돕는 소중한 선물이 되기도 한다. 내가 그린 그림. 세상에 둘도 없는 가장 특별한 그림이었다. 응.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 그림에 더없는 애착을 갖게 되었는데, 마침 오늘 교수님도 그러셨어.
"여러분들이 그린 그림은, 여러분들이 그렸기 때문에 가장 특별한 그림입니다. "
그림 그리기는 명상이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나를 조용히 응시하는 것이며, 끝없는 탐미와 자유정신이 소리없이 요동치는, 묘한 행복감에 이따금씩 바르르 떨게 되는, 짜릿한 작업. 아, 작업, 작업이라기보단, 외려 치유이고, 위로이고, 어루만짐이다.
난 이전에 미술이, 그림그리기가, 이와같이 매력적이고 행복한 예술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학창시절엔 미술시간이 가장 괴로웠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었다. 얼른 이 모든게 끝나서, 다시는 미술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간절히도 바랐었다. 아.. 얼마나 어리석고 불행한, 강박의 피해자였던가. 삶의 즐거움을, 또다른 매력과 신비로움이 가득한 예술을 모르고 살 뻔했다고 생각하니, 내가 지금 이 전공에서 공부하고 있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구나 싶다. 모든 분야의 학문적, 예술적 가치를 다시 발견할 수 있는 기회라니....!
황미 교수님께 정말 무한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교수님의 첫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난 내부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숨어있던, 아름다움에의 기갈증과 감각이 다시 깨어나고, 참던 숨이 터지는 것을 느꼈다. 참 많은 이야기를 해 주셨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태도에서, 본인의 영역에 진심으로 매력을 느끼고 그것의 즐거움에 푹 빠져있는, 한 사람의 행복이 나에게까지 전이되었다. 많은 말씀을 해 주셨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이 한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잘 그린 그림이란 없습니다."
미술의 세계에 관한 나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첫번째 순간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순간-, 그 시간에, 교수님께서 물어보셨다. "나는 그림 그리기가 정말 괴롭다, 손 들어봐요. " 난 정말로, 솔직한 심정으로 번쩍 손을 들었다. 진심이었다. 그런데, 우리반에서 그때 손을 든 사람은 나 혼자였다. 처음으로 약간 충격을 받았어. 다른 사람들도 다 나같은 줄 알았는데, 그림그리기가 괴롭지 않고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도 있구나, 문득, 꽤나 큰 의미로 가슴속에 각인되었었다. 교수님께선, 내게 그림 그리기가 괴로운 이유를 물으셨다. 나도 모르게 나온 대답이 이러했다. " 마음 속에 있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그게 뜻대로 표현되지 않으니까 만족스럽지 않고, 그래서 짜증이 나요. " 교수님께선, 나의 그 대답에, 미소를 띠고 답하셨다. 이번 학기에, 표현하는 여러 방법을 탐색하게 될 테니,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대해도 좋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술,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림그리기는 나에게 너무나도 먼 존재였다. 특별한 사람들이나 잘 할 수 있고, 학원에서 전문적으로 배워야만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 과목, '만점'을 받으려면 '완벽'해야 하는데, 본래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기에 더욱 손에 잡히지 않고 고통스런 과목. 강박 탓에, 붓터치 하나, 연필 선 하나도 자유롭지 못했다. 즐거워야 할, 지극히 본능적이고 아름다운 행위가 단지, '잘 그린 그림'이 되어야 한다는 스트레스, 그 하나 때문에 더없이 끔찍하고 피하고만 싶은 일이 되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의 결과물을 늘 흘깃거릴 수 밖에 없었고, 내가 '최고'여야 했기 때문에 모든 작업과정은 당연히 '괴롭고 끔찍'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한 마디, 잘 그린 그림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한 마디에, 10년간 나의 미적 감각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확 걷혀오르고,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본능의 작은 물결이 퐁당대는 것이었다. 아아. 물감과 크레파스, 파스텔, 색연필, 연필, 그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것이 있을 때, 어떤 두려움도 없이 본능적으로 손을 움직이며 미소짓던 어리고 달뜬 나의 아가를 추억하였다.
놀랍지 않은가. 나를 이전의 어리석던 상태로 만든 것도 교사와 교육이었고, 지금의 나로 만든 것도 교사와 교육이었다.
생각나는대로 막 쓰긴 했지만,
다 쓰고보니 부제가, 결국엔, 어찌, '교사와 교육의 힘'이 되어버렸네.
하고 싶은 얘기는 어쨌든 많았던 것 같은데. -_=...